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1.21 사태
1.21 사태 개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124부대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를 습격.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다 실패함.
사건의 배경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한일관계가 회복되는 시점이었다.
한미일 협력이 강조되면서 북한은 고립되는 형국으로 1.21사태를 주도한듯.
침투 작전의 전개
1월 13일 조선인민국 김정태가 청와대 습격에 대해 지시.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에서 차량으로 출발하여 1월 21일 일요일로 작전 날짜를 선택했다.
왜냐면 국군과 주한미군의 경계가 느슨해질 것을 예상.
당일 날, 북방한계선 돌입 후,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
9시 50분 경. 자하문 초소에서 순경에게 첫 검문을 받았다.
그러자 공비들은 우리는 CIC 소속 대원이라고 주장하며 위협적인 언사를 사용했고 경찰은 병력을 통제하려 했으나 공비들이 눈치채고 총을 난사하며 도주함.
이로인해 총 32명이 사망, 군경 25명. 민간인 7명.
부상자 52명.
31명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 생포되었는데 그 한 명은 김신조 소위이고 다른 한 명은 미확인
사건의 역사적 의의
1, 이 계기로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탄생함.
2, 군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으며 군 훈련 강도가 세짐.
3,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 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전투 경찰대가 창설됨.
4, 대만민국 사회에 큰 충격과 군사적 긴장 상태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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